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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심장』 1부 2장 「검은 바람의 수도사」 본문

창작/시간의 심장

『시간의 심장』 1부 2장 「검은 바람의 수도사」

drawhan 2025. 6. 24. 13:07

유럽 대륙을 덮친 흑사병, 검은 죽음의 그림자는 1348년 겨울 한가운데까지 깊게 내려앉았다. 전염병은 도시를 휩쓸고, 시골까지 멈출 줄 모르는 공포를 퍼뜨렸다. 거리엔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 혼란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바르톨로메오는 존재했다. 검은 수도복을 입고, 죽음과 마주한 자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는 수도사였다.

바르톨로메오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늘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폐허가 된 수도원 밖에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었으며, 그에게만 들리는 ‘절대자의 속삭임’이었다. 처음엔 미친 소리라 여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명확한 메시지임을 깨달았다.

 

“네가 선택되었다.”

그 목소리는 반복되었고, 바르톨로메오는 이 ‘선택’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다. 이 소리는 때로 희망처럼 다가오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극심한 고통과 불안을 몰고 왔다. 병든 자들의 신음소리, 죽음의 냄새,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시신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신비로운 채널을 열어갔다.

 

수도원의 어두운 방 안, 바르톨로메오는 손에 쥔 작은 가죽 노트에 신음 섞인 글씨로 기록했다. 그 글귀들은 단순한 예언이나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진실’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는 것임을 알았다. 목소리는 그에게 미래의 단편들을 보여주었지만, 그 단편은 온전하지 않았다. 왜곡되고 뒤틀린 조각들이었다.

 

“너는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고통 속에서 진실을 찾아라.”

 

절대자의 명령은 가혹했다. 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환각과 망상을 겪었으며, 죽어가는 이들의 마지막 숨결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진실에 닿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다. 그리고 점차 그 고통은 그의 일부가 되었다.

 

어느 날, 수도원 근처 마을에서 그는 작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이미 검은 바람에 갉아먹힌 채 거의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바르톨로메오는 조용히 아이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절대자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너의 고통은 너희 모두의 고통이다.”

 

그 목소리는 희미한 빛줄기처럼 그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었다. 바르톨로메오는 알았다. 이 목소리는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시간을 초월해 이어져온 ‘선구자’들의 집합적 외침이었다. 그들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절망이 섞인 진실이었다.

 

그는 수도원으로 돌아와, 자신이 기록한 글을 다시 펼쳐 보았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들의 눈에 그 기록들은 위험한 문서에 불과했다. “악마의 속삭임”이라며 기록들은 불태워졌고, 바르톨로메오는 추방되었다. 그는 그날 이후, 산속 오두막으로 숨어들어 인간 사회와의 연결을 끊었다.

 

그 오두막에서 그는 외로움과 싸웠다. 절대자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그가 겪는 정신적 혼란은 날로 심해졌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절대자의 목소리는 ‘선구자’들 사이에 이어진 끈, 그리고 ‘시간의 심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이 짐이 결국 인류의 미래와 연결된다고 믿었다.

 

어느 눈 덮인 날, 세리온이 그를 찾아왔다. 세리온은 바르톨로메오에게 낡은 금속 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은 바르톨로메오가 한때 손에 쥐었던 ‘시간의 심장’의 조각이었다.

 

“이 조각을 본 적 있습니까?”

 

바르톨로메오는 떨리는 손으로 금속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문이다. 네 정신을 열고 나면, 너는 그 문을 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정신 속으로 점차 연결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그 공간에서, 바르톨로메오는 세리온과 함께 수천 년 전부터 이어진 선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대 이집트의 여사제, 중세의 수도사, 근대 과학자, 그리고 먼 미래의 예언자들이 한데 모여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은 고통과 함께한다. 그 고통을 피하려는 자는 진실도 거부한다.”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세리온에게 넘기려 애썼다. 그것은 마지막 희생이자, 운명이었다. 그의 의식이 점차 사라져갈 때,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은 너를 미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은 반드시 가야 한다.”

 

그는 눈을 감았고, 그의 숨결은 세리온에게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절대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명료해졌다. 이제 세리온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시간의 심장’을 품은 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그날 밤, 바르톨로메오의 낡은 수도복이 차가운 바람에 흔들렸다. 검은 바람의 수도사는 죽었지만, 그의 목소리와 고통은 영원히 시간 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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