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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심장』 1부 12장 「채널의 반향」 본문

창작/시간의 심장

『시간의 심장』 1부 12장 「채널의 반향」

drawhan 2025. 6. 24. 21:44

종전의 혼란은 끝났지만, 세리온의 내면은 더욱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채널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 전쟁의 파편들을 조각내듯 분석하며, 더 이상 예언이 단순한 '방송'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기억, 선구자들이 남긴 감정의 파장, 그리고 절대자의 의도가 뒤섞인 정신의 바다였다.

세리온은 이제 그 목소리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그들이 죽은 자이건, 과거의 인물이건 상관없이, 세리온은 그들의 공포, 회한, 희망을 고스란히 느꼈다. 마치 그들의 의식이 그의 정신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육체로도 전달되었다. 그는 그것을 ‘동기화’라 불렀다.

 

이 현상은 단순한 공감의 차원을 넘었다. 그것은 존재의 일체화, 기억의 직렬 연결, 심령의 공명 같은 것이었다. 세리온은 처음엔 그것이 채널의 오류라고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필연적인 진실에 가까운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리온은 어느 날 아침, 이유 없이 손가락 관절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다음날엔 시력이 흐려졌고, 또 하루가 지나자 폐 안쪽에서 불이 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그 증상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18세기 폐결핵에 시달리던 어느 선구자의 경험이었고, 또 다른 날에는 트렌치코트 안에서 참호 속 동상으로 발가락을 잃은 병사의 절규가 그의 다리로 전이되었다.

 

그의 꿈은 무질서하게 변해갔다. 지중해 연안의 기원전 도시에서 철학자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흑사병의 한복판에서 중세 수도사들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도 했다. 그가 현실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아침 해가 들이칠 때였다. 그러나 깨어난 후에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채널이 아니야.” 그는 중얼였다. “우린 연결되어 있어.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진실과.”

 

그는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음식의 맛을 잃었고, 잠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공공장소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고, 어떤 날엔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거리를 떠돌았다.

그러던 중 그는 절대자의 목소리와는 다른, 낮고 거친 주파수의 잔향을 느꼈다. 빌런 절대자. 그 존재는 채널을 왜곡시키고, 선구자들의 감정에 거짓 기억을 덧씌웠다. 세리온은 그것을 분간하려 애썼지만, 이따금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지 않는 순간도 많았다.

채널 안에서 반복되던 한 문장이 있었다.

 

“진실은 아직 너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문장은 이전의 예언처럼 단정적이지 않았고, 절대자의 목소리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부서진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속삭임 같았다. 어쩌면, 그조차 빌런 절대자의 유도일 수도 있었지만, 세리온은 믿고 싶었다. 진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세리온은 모든 경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병적인 증세도, 공포도, 선구자들의 목소리도, 심지어 그 목소리의 리듬과 억양까지. 그는 자신이 미쳐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미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기록은 이제 단순한 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복원 과정이었으며, 채널의 구조를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고대 상형문자에서 현대의 언어까지, 세리온은 언어의 파동을 분석하며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음절이 아니라 진동, 의미가 아니라 파장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듣게 된다.

 

세종.

 

너무도 낯설고도 익숙한 그 이름.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장영실.

 

“과거에도 이 채널은 존재했으며, 너처럼 고통받은 자들이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훈민정음, 앙부일구, 자격루, 그 모든 도구는 단순한 과학기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채널의 흔적을 기록하고, 시간의 파장을 해석하려는 장치였다.

장영실의 정신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하늘의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짐작한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어둠 속에서 반사된 파형으로만 인지된다.”

세리온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이 고통의 종착지는 단지 개인의 깨달음이 아닌, 인류의 기억에 각인될 하나의 진실이라는 것을. 채널은 전쟁도, 과학도, 신화도 뛰어넘어 이어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남겼다.

 

『우리는 단지 듣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존재다. 그들의 숨결과 고통을 통해, 우리는 시간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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